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5 < 텔레비전을 버렸다 > 나타난 것은또한 사라지기 마련이어서아침저녁 하루도 빠짐없이 애국가를 불러사상을 검증받았다 한들별수 없는 것이다손바닥 몇 대로 잦은 고장을 추스르는 일도그녀의 무릎처럼 더는 무리다 내가 평생 전한 것은 비록 값싼 유희였으나그녀는 거의 모든 드라마를 보며 울었더랬다나는 성실했으므로 후회가 없고내세를 보장받지 못할 것을 안다새 텔레비전이 도착하는 내일에는고물상이 올 것이다 나는 파괴될 테지만혹시 알아?운 좋게 바다 건너 타갈로그어로 우는이국의 귀부인을 만나게 될지 2014. 8. 11. < 선잠 > 아무리 못난 인생이라도 유년시절로 돌아가는 자투리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곳엔 거짓말처럼 옛 시절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마을 어귀에서 풍기는 낯익은 냄새만으로도 성공적인 귀환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설레는 기분으로 포장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수십 년이나 남은 흙길을 걸어 내가 살던 외딴집 초가지붕 아래에서 아, 지금은 볕이 좋은 오전 열한 시 나는 길 위에 부서지는 붉은 광채를 담으려다가 하마터면 눈멀 뻔했다 하여 시선을 피한 그늘 한편에 왕바랭이와 어린 망초와 이끼와 이름을 모르는 잡초들이 나를 기다리느라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을 보았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여기에는 뻐꾸기와 뜸부기가 실컷 울어댔고 그래서 사람만 빼면 다들 후련했고 북향집 뒤뜰에는 그나마 햇빛이 들어 다.. 2014. 7. 16. < 열대야 > 더위가 아깝다.데는 한이 있더라도꾹꾹 눌러눈꺼풀 밑에 묻어두어야겠다.자취생 시절새파란 겨울날에밥이 얼어버린 새벽에눈시울만은 뜨거웠던 것을 생각하면서 2014. 7. 11. < 거울 > 너는 나보다 넓은 등을 가졌구나한번 맞대어 보자 욕실에서의 긴 독백은민망하다기보다는 쓸쓸한 일이었다 너는 그저 내가좋으냐? 물으면아무 말 말고응응, 울리기만 해라 2014. 7. 4.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