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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59

< 오랜만의 귀가 > 농도 짙은 밤을 과음하고방 안으로 굴러떨어졌다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자는애인의 품도 나락이었다이곳은 쉽게 헤어날 수 없는 구덩이불길한 미래를 저지하고엄습하는 좌절을 방어할 요량으로 조성한견고한 참호친구여 나를 끌어내 주게이만 전쟁을 끝내주게차라리 현관문을 잠그고열쇠를 삼켜버리게이런 자는 세상에 없었노라며못 본 척 돌아가 주게오랜만의 귀가였네실로 오랜만의 외출이었으므로 2024. 10. 20.
< 정동진 > 저것은 바다가 아니다 밤새 이슬을 마시고 알아낸 저것은 청록빛 슬립이다 허옇게 드러낸 육지를 덮으려고 수억 겹 하얀 레이스를 수평선에서 보내오는 것이다노련한 연인은 레이스를 들추고 보증 없는 언약을 새긴 후 새처럼 달아났다 사라지는 언약을 돌아보지 않은 그들은 처음부터 영원한 것을 믿지 않았다 헤어지면 오려무나 하는 갈매기의 농담은 그래서 챙겨놓을 만하다열차시간에 쫓겨 갈 사람은 갔고 발자국을 씻어낸 백사장 위로 낯선 연인들이 줄지어 왔다 나는 안다. 사랑은 끊임없이 시도되리라는 것과 인류가 멸종할 리 없다는 것과 바닷가는 사랑을 촉진하기에 그만이라는 것을.이제는 믿는다 빗질하던 아내에게서 파도 소릴 들은 적 있다는 기러기 아빠의 꼬부라진 말을 2024. 10. 10.
<시간 여행> 오랜 세월 달려와 현재에 이르렀으나낙원은커녕꿈꾸었던 사랑도소망했던 세상도 없이거울 속에 늙은 얼굴 하나덩그러니 남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시간이 멈춘 유년에가만히 머물러나 있을 걸 미래란 부모를 죽이고 아이들을 늙게 할 뿐 나는 속이 상하여 머리칼을 검게 물들이고거울 속 아버지의 수염을 민다 젊어져라 이놈부디 젊어져라 2024. 10. 9.
< 가느다란 격려 > 타인의 주위를 공전하는 건 쓸쓸한 일이었어 빅뱅 이후 줄곧 별과 별 사이가 멀어짐을 느끼며 나는 철들었지 일생 어울린 사랑도 종내 멀어지리란 걸 오랜 친구여 세상을 탓하지 말자 상식을 뒤집으면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법 외로움을 이기자 천동설을 믿자 2022.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