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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5

< 관계의 각도 > 지구는 둥급니다.때문에 멀리 떨어진 우리는서로 다른 각도로 서성입니다.사랑은 면밀히 계산되지만번번이 어긋납니다.당신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고이곳과는 다른 각도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수직으로 서있습니다.이제 와 근황을 묻는 건 무의미합니다.지낼만합니까.당신은 북극성처럼 존재하지만좀처럼 찾아갈 수 없습니다.거듭 말하지만 지구는 둥글고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인정하지 않습니다.알게 뭡니까.다행히 우리는 닮은 구석이 있어서고집을 접을 수만 있다면다시 거리를 좁히고아예 끌어안음으로써외로움의 각도를 좁힐 수 있겠습니다.다시 올 성탄 전야에는함께 수평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 2019. 1. 23.
< 좋은 날 > 살아있다는 것은가능성이다.울 수 있다면웃을 수도 있으리라는. 만날 우울한 얼굴들도움푹한 볼 안에는어머니 자궁에서부터웃을 줄 아는 근육이 구비되어있다.그러니 영영 웃을 수 없게 됐노라는체념은 섣부르다.귀와 가까운 그것은,턱과 어울려 밥이나 축낸다고 여겨지는 그것은,예컨대 그리운 벗이 전화를 걸어오는 날시무룩한 입꼬리를귓불 곁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반가운 목소리함께 듣자고. 2019. 1. 22.
< 행려 > 그는 쓸쓸함을 몰고 오는 사람이다.한 무리 낙엽을 거느리는 사람이다.그가 여름을 견딜 수 있었던 건그늘이 깊은 플라타너스 덕분이었다. 추위와도 친분이 깊은 그는짧은 바짓단 밑으로일찍부터 겨울을 불러들였다.서리가 엉긴 머리칼을 쓸어넘길 때마다겨울이 깊어졌다. 담배가 떨어지고부터는버석거리는 손에그을음이 짙어 갔다.하느님의 휴가가 길어지고 있을 때였다. 그의 사인은 불분명하다.다만 길 위에 눕는 것은 무엇이든해석의 여지없이 소각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동무를 잃은 낙엽들이 우물쭈물 흩어진 것도그 무렵이었다. 2018. 11. 30.
< 환절기 > 한 해가 저물 무렵이면어머니는 어깨를 움츠려가슴이 바스러지는 소릴 냈다.당신은 영영 겁쟁이가 된 걸까.아버지는 죽었잖아요. 이제 그만 잊으세요.아니다, 얘야. 어젯밤에도 네 아버지가 나를 때리던걸.그건 꿈일 뿐, 지금은 제가 있잖아요.내가 모를 줄 아니.떨어진 낙엽을 너그러이 봐주는 날도 한철일 뿐결국 아무렇게 치워지잖니.그러니 내가 죽으면 깨끗이 화장하려무나.사는 동안 바짝 울어두었으니 연기 없이 훌훌 탈 게다.어머니, 저는 낙엽을 태우지 않겠어요.바스러지게 밟지도 않겠어요.시간이 다하기를 기다려모든 것이 끝난 후 나의 길을 가겠어요.앓고 떠나는 몸살처럼슬픔도 한철인걸요. 2018. 1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