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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5

< 콩밭에서 > 시골집 나지막한 뒷산에여린 잎이 풍성한 나뭇가지들이흡사 수초처럼 바람에 흔들렸습니다아직 태풍은커녕 장마조차 겪지 않은어린 것이었음에도소리로는 제법쓸쓸한 가을을 흉내 내고 있었습니다 표현할 방법도 없고사전에도 없는 그 소리를아아, 나는요삽질을 멈추고새 울음을 멈추고우주를 멈추고비석처럼 가만히 듣고 섰다가,느낄 수 있음에 앞서들을 수 있음을 먼저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때 허락 없이 해가 산을 넘어갔습니다 2013. 6. 30.
< 김포 > 큰일 났네. 베트남 새댁초행길 버스에서 길을 잃었네엉거주춤 앉았다 일어서길이십여 분째 뚫어져라 노선표를 구멍 내놓고믿었던 검지마저 한글을 몰랐네떤등고애떤덩고예썬응보애 고향 땡볕에 타듯 붉어지는 안색을눈치 빠른 기사님은 한 눈에 아셨네천등고개요? 아무것도 모르는 친정아버지가환한 얼굴로 뒤따라 내린정류장 천등고개 갈아타고 갈 길은아직도 먼데 2013. 6. 27.
< 친구 > 놀러 나온 두 소년이발맞추어 걸었다부축하듯 서로 어깨를 엮는 것으로한나절의 운명을 엮었다오솔길은 이내 끝나고집 나올 적 기대감과 파릇한 우정은펄펄 끓는 개활지 앞에단단히 시험 들었다 소년들은 나아갔고짧지 않은 길 위엔개구리며 살무사가병사의 죽음처럼 타죽었다절름발이네 논둑길을 지날 때쯤엔땀 젖은 실루엣 하나가잠시 휘청인 듯도 한데,누구도 먼저 어깨를 풀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그들에게길은 멀어지는 심술을 부렸지만넋조차 녹이는 도가니 속이라도작은 보폭이나마멈추지만 않는다면길 끝 너머 좋은 세상만날 수 있겠지? 머얼리, 신작로 끄트머리에이국의 도시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2013. 6. 25.
< 완두콩 > 암매장 당하고도 당황치 않고 꼼지락거리기를 몇 날 며칠 마침내 제힘만으로 고래 숨처럼 뿜어져 나온 완두콩 완두콩 눈먼 초록뱀처럼 갈라진 혀를 뻗어 허공을 더듬은 지 다시 몇 날 며칠 마침내 나뭇가지를 움켜쥔 완두콩 완두콩 '놓치지 않을 테야!' 필사적인 그에게 '거 봐, 죽지만 않으면 다 사는 수가 있다니까' 마늘이었다 2013.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