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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5

< 승천 > 얼음장같은 하늘에만년설이 떠내려가고맹금류가 선회했다. 남자는 토끼를 죽이러 떠났다.발자국을 좇아캄캄한 숲을 통과하니높다란 눈 언덕 토끼똥이 뜨겁다.멀리 가지 못했으리라마는옴폭한 발자국이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그는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하느님... 오, 하느님나도 데려가 줘요. 2020. 6. 21.
< 해송 > 늙은 그가 서 있다. 속마음이 궁금하여청진기를 대봐도 고요하다. 그는 청청하며악어의 외피를 가졌으되희멀건 뱃가죽 같은 건 없다. 그의 역사는 단단하다.눈비에 젖어 물러질 만도 하였으나해풍에 맞서 육체를 단련했다. 나보다 오래 산 그를마땅히 우러르면서도 굽은 몸 한 귀퉁이에는안일한 속살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아니다.저 악쓰는 옹이. 2020. 6. 6.
< 고양이와 일요일 > 당신은 고양이만큼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입니다.또한 움직임에 반응합니다.나는 부단하고 유려한 운율로예민한 시선에 사로잡히려애를 썼습니다.사랑이란주전자를 높여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일.서로가 좋다면굴욕은 없습니다.일요일 정오에가만히 앉아 있는 당신을대접하겠습니다.햇빛 부서지는 발등에입 맞추겠습니다.덕분입니다.많이 배웠습니다.오늘도 고양이 낮잠 같은 하루였습니다. 2020. 5. 31.
< 2003 > 강화도의 중력은 유별났으므로막차가 김포를 지나기 전부터머리를 천 근 만 근 무겁게 했다.숙취 탓인지는 몰라도통진을 지날 즈음엔가벼운 욕설조차 발밑에 나동그라졌다. 검문소 지나 다리를 건넌 직후에는쇠구슬 같은 밤공기에 사레가 들렸다.논을 가로지르는 고라니 형편도살얼음 위로 곤두박질쳤다.그래, 사실대로 실토하자.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했노라고. 나는 달표면에 첫발을 딛는 우주인처럼커다란 도약으로 정류장에 내려서다발목이 부러질 뻔했다.그렇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건 무거운 일이다.하여 가벼워질 요량으로 숨을 훅훅 뱉으며 걷는데,저녁 차려 놓으랴 물으시는 어머니 목소리만이전화기 너머에서 홀로 가벼워지고 있었다. 2020.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