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1 < 노숙인 대피소 > 사냥감이 멸종된빙하기의 포식자처럼하릴없이 역전을 떠돌다가도해 저물면 얼지 않으려어둑한 동굴로 찾아들었다더듬더듬 자리를 잡은 다음막장 인생에도 예절은 있다는 듯신발 벗어 가지런히 놓으면코를 찌르는 악취에누구 하나 살갑게비벼 오는 이 없었다 저어쪽에 누군가가내년에는 일자리를 얻고우울증도 치료하겠노라는작심삼일의 각오를 떠들자,매일 아침 넥타이 매고 역전을 오가는바쁜 의욕들의 정체가또다시 미궁에 빠져버렸다 에라이,벌러덩 누웠다가 찌릿해오는어깻죽지의 종기를 만지며,'결국 지느러미가 나려는 게지이렇게 퇴화되다가는영영 바다로 돌아가고 말 테지' 하면서도끝내 꿈꾸는 잠을 청하지는 않았다 2011. 12. 19. < 꽃과 영삼이와 개암나무 > 아버지가 재주껏 주먹을 휘두르던 밤발작 같은 소란 속에서나는 꽃을 떠올렸다뜨거웠던 정오의 개울서 발가벗고 까불던 영삼이 놈을 떠올렸다누나에게 손 붙들려 맨발로 도망쳐 나온서사국민학교 정문 앞에서저어기, 무심하게 불 켜지 않는 선생 사택 옆 개암나무를 떠올렸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고함에도꽃과 영삼이와 개암나무는 돌아보지 않았다아픈 삼차원으로부터의 탈출로시야는 흐려지고 귀는 아득해졌으며감각을 알 수 없는 다리는부드러이 허공을 휘저어 나아갔다그럴수록 꽃은 더 선명해졌고영삼이는 더 크게 웃었고개암은 더 고소해졌다진공의 밤하늘엔 누구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2011. 12. 15. < 성탄의 연인 > 나는 당신이상상력 풍부한 사람이었으면좋겠습니다귀 떨어지는 겨울날의 데이트아침 먹은 지 여덟 시간째에허기에 떠밀려 빵집 앞에 서겠지만뒷주머니 속 뻔한 밑천에출입문조차 잡지 못할 테지요하여, 진열대의 케이크들 중고급스런 놈들만을 가리켜이것은 너무 달아 싫고저것은 느끼하여 싫다 하는마음에 없는 품평을 늘어놓고 돌아서서는딱히 갈 곳 없을 우리는가난하고 요령 없는 연인들이 그러하듯플라스틱 테이블에 마주 앉아오들오들 끼쳐오는 오한을싱거운 농담으로 녹여보려 할 겁니다그러나 말재주마저 변변치 못한 탓에때워야 할 침묵만 켜켜이 쌓여가고때마침 내리는 기적같은 눈에도시무룩히 고개 떨굴 때쯤이리저리 코트 주머니를 뒤진 당신은꼭 쥔 주먹 내밀어'빵'이라고 말하겠지요?재치 없는 나는 말입니다,주먹 안에 빵이 들었다는 것인지주먹이.. 2011. 12. 9. < 단풍 소식 > 물드는 것이 어디 단풍뿐이랴 가을 산엔 제 몸보다 무거운 땔감을형벌처럼 지고 내려오는 백발노인이 산다형광색 옷차림의 당신은산행 두어 시간 만에 마주친 그가반갑기도 하겠거니와못 본 척 지나치기도 뭣한 마음에인심 좋게 길섶으로 비켜서서는땀에 젖은 허연 얼굴을 훔치며낭만의 계절이라는 둥공기 좋은 곳에 사셔서 정정하시다는 둥심지어 보잘것없을 올해 소출 걱정까지말끝마다 선생님 선생님 붙여가며서울 사람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싶겠지만,내년에도 단풍은 든다 가파른 토끼길로 접어든 노인은겨우살이 걱정이다 2011. 9. 27. 이전 1 ··· 34 35 36 37 38 39 40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