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167 < 잡부의 새벽 > 대문 밖으로 노인이 피처럼 흘러나왔다 날숨 속엔 한 줌 자갈이 섞여있었고 밤새 졸인 아교를 뱉을 때마다 죽음이 생生 위에 사납게 엉겨 붙었다 눈치껏 바람에 합류한 담배연기와 달리 그는 싸락눈이 쌓인 비탈길을 외로이 내려갔다 녹슨 대문이 악쓰듯 닫히며 시류에 둔한 주인을 나무랐지만 혈육을 본 지 오래고 지금은 몸을 녹여줄 드럼통이 간절할 뿐 그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다만 뒷주머니에 매달려 나불대는 목장갑을 쑤셔 넣고서 오늘도 하류로 가야 한다 가서 조속히 하루를 끝내기로 한다 퇴근길에 들이켜는 넉 병 막걸리야말로 홀로인人을 위한 더없는 위로인데, 어느덧 굵어진 눈발과 사라지는 발등과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일생처럼 오늘을 공칠까 싶어 무던히도 걱정하였다 2024. 12. 22. < 풍경에 대하여 > 너는 풍경이었다. 계절처럼 바뀌는 표정과 버들가지 손짓과 낙조에 젖은 안색과 카나리아 웃음소리를 나는 사랑했다 일렁이는 머리칼은 장관이요 함박미소는 백미였으므로 나는 그만 바보가 되어서 산그늘 시퍼런 너의 가슴팍에 세 평 오두막을 짓고 평화로운 오후에 일생을 마치는 상상을 했었다. 이제 너는 어디에서 병든 일생을 불러 모으고 탄성을 자아내며 오두막을 짓게 할까 실바람만 불어도 너울춤추던 못내 잊히지 않을풍경이여. 2024. 12. 15. < 존재의 입자 > 나는 나를 분해하는 데에 인생을 허비하였습니다 단서로 남은 지문과 이지러진 족적과 흐릿한 영혼을 참고하십시오 종내는 그마저 분해되어 보이지 않겠지만요 영혼을 믿는다는 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울음을 삼킬 수 있습니다 호흡을 멈출 수 있습니다 벤치에 앉아 발끝에 머무는 영혼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2024. 11. 30. < 나른한 광기 > 파리를 죽였습니다. 웃기는 얘깁니다만 그가 고통을 느꼈을까요 웃으시네요-그가 필사적으로 도망친 까닭은죽음을 이해한 탓일까요-말이 없으시네요 선인장은 지난주에 죽었고 비좁은 방에 갇힌 우리 둘은 왠지 승부를 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죽은 이의 눈부터 파먹는 그의 식성을 생각하면 뚜렷한 위협이었습니다.나는 그런대로 살아있었으니까요용케 파리채를 피하는 그를 보며하루살이보다 장수할 운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고 여겼지만 XXXX!운이 다한 그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내가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 건 순전히 나비와 판이한 그의 외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존엄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검고 음침한 털투성이 몸뚱이로 썩은 음식이나 인분 따위를 비위 좋게 빨아대는 천박함 때문이었을까요 .. 2024. 11. 24. 이전 1 2 3 4 5 ··· 4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