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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

< 나른한 광기 >

by 제페토* 2024. 11. 24.

< 나른한 광기 >

 

 

파리를 죽였습니다.
웃기는 얘깁니다만 그가 고통을 느꼈을까요
웃으시네요-그가 필사적으로 도망친 까닭은
죽음을 이해한 탓일까요-말이 없으시네요
선인장은 지난주에 죽었고
비좁은 방에 갇힌 우리 둘은
왠지 승부를 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죽은 이의 눈부터 파먹는 그들의 식성을 생각하면
뚜렷한 위협이었습니다. 나는 그런대로 살아있었으니까요
용케 파리채를 피하는 그를 보며
하루살이보다 장수할 운명을 타고난 게 분명하다고 여겼지만

운이 다한 시신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 건
순전히 나비와 판이한 그의 외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존엄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검고 음침한 털투성이 몸뚱이로 썩은 음식이나
인분 따위를 비위 좋게 빨아대는 천박함 때문이었을까요
이제 와 그를 되살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변명하자면 내가 어머니 자궁으로 기꺼이 헤엄쳐 간 것처럼
변변찮은 방으로 들어온 그에게도 과실이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작아서

공룡이 죽었을 때와 같은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뭇사람의 연민이란 대개 부피에 비례합니다
너무 작아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몸이 나의 용기를 북돋았으니
죽음은 온전히 그의 책임입니다
나는 그와 공룡의 중간쯤 되는 크기이므로
어떻게 해명하든 어중간한 변명이 될 뿐이니 유감입니다
그를 죽이기 위해 3 칼로리를 소모하였고
삼각근과 대둔근에 발생한 미미한 활력이야말로 그를 죽이고 얻은

실질적 소득입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이겨보았고
이겨본 경험은 보다 커다란 종을 죽일 용기를 주었습니다
새를 죽이겠습니다
시간이 멈추고 기분의 대류가 멈추고
공기 입자가 제자리로 정렬된 지금은
고요합니다
세상은 어제처럼 재미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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