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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 어디서 낯선 바람이 불어와 졸고 있는 나를 흔드는가 반세기 동안 쌓인 무게는 어디로 가고 갈잎처럼 들썩이는가 기왕에 바람을 타자 뒹굴던 비닐봉지도 바람을 타고 아득히 날아올랐다 서둘러 들녘으로 나가자 내 욕망은 천 개의 손이 있어 무성한 바람의 갈기를 놓칠 리 없다 앞서 한 장의 각서를 쓰기로 하자 내려오지 않으리란 각오로 주저하는 다리를 자르기로 2021. 4. 8.
< 사람을 찾습니다 > 산이 많은 나라에서 나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사시나요. 우리 눈은 마주쳤을까요. 옷깃이 스쳤을까요. 어깨를 부딪혔다면 미안합니다. 오늘도 밤새워 편지를 쓰는 까닭은 이른 아침에 태우기 위함입니다. 용건이 분명한 연기를 피우기 위해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부채질을 해야 합니다. 보고 싶다 말하기엔 늦었고 그립다 말하기엔 섣부르다는 걸 압니다. 바쁜 당신은 하던 일을 하십시오. 다만 매캐한 안부가 코 끝에 닿거든 허리를 세워 산 너머를 봐주십시오. 나 여기에 있습니다. 2021. 2. 21.
< 로드킬 > 일기가 나쁜 밤이었다. 가드레일이 없는 타지의 국도는 외지고 어둡고 누구도 횡단을 연습한 적 없었다. 가로등마저 없는 0시에 길 위에 서는 야생동물은 다소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달려오는 빛을 발견한 그 밤도 다만 황홀했을 뿐 거리를 가늠하지 못했다. 홍채가 수축하고 빛이 천둥소릴 낸 순간 지난밤 열린 눈 속을 가로지른 외줄기 유성이 무엇을 암시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통은 짧았다. 별안간 닫힌 이승 위로 겨울비가 억수 같을 뿐. 2021. 2. 3.
< 부끄러운 애도 > 연민이 봄볕 같아도 분노가 불볕 같아도 네가 묻힌 땅은 얼음장이다. 세상에 영혼이란 것이 있다면 또래의 입김에 섞이어 눈 덮인 놀이터를 선회했을 테지만 무슨 수를 써도 너는 돌아올 수 없다. 안일한 자들이 멍든 손을 놓친 이후로 더 이상 재잘거리지 않을 만큼 너에게 침묵은 쉬운 일이 되었지만 작은 점처럼 외로이 웅크린 마지막을 생각하면 이제 와 눈이 붓도록 울어준들 이름만이 서러워질 뿐이다. 너의 죽음은 너무 이르고 나쁜 습관처럼 우리는 면목이 없다. 2021.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