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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

< 선잠 >

by 제페토* 2014. 7. 16.

< 선잠 >

 

 

아무리 못난 인생이라도
유년시절로 돌아가는 자투리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곳엔 거짓말처럼 옛 시절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마을 어귀에서 풍기는 낯익은 냄새만으로도
성공적인 귀환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설레는 기분으로
포장이 되기까지는 아직도 수십 년이나 남은 흙길을 걸어
내가 살던 외딴집 초가지붕 아래에서
아, 지금은 볕이 좋은 오전 열한 시

나는 길 위에 부서지는 붉은 광채를 담으려다가 하마터면 눈멀 뻔했다
하여 시선을 피한 그늘 한편에
왕바랭이와 어린 망초와 이끼와 이름을 모르는 잡초들이
나를 기다리느라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을 보았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여기에는
뻐꾸기와 뜸부기가 실컷 울어댔고
그래서 사람만 빼면 다들 후련했고
북향집 뒤뜰에는 그나마 햇빛이 들어 다행이었다
멀리서 돼지를 몰아 오는 아랫말 아저씨는
돈도 좋지만, 가여운 것의 저승 가는 길에서는
일부러 회초리에 힘을 싣지 않았다

뒤를 이어 소달구지가 똥을 떨구고 갔고
한참을 새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정오에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미루나무의 이파리들이
그물에 갇힌 전어떼처럼 미풍에 반짝거리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다섯 살만큼 작아진 손을 꼭 그만큼 작아진 귀에 대고서는
잎사귀들이 내는 좋은 소릴 들으려 했는데
그러면 홀로 남겨진 세상이 더는 심심하지 않을뿐더러
이제는 꿈인 것도 잊었고 하니,
다만 밭에 나간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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