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이 올 때 >
빈 소주병에 수저 꽂고 흔들면
짤그랑짤그랑 신이 왔다.
시는 그렇게 왔다.
신은 얼큰한 은총을 내렸고
시는 뭉클한 의미를 내렸다.
그러니까, 오후의 햇빛은 지나치게 서글펐으므로
은행나무 잎으로 정제되어야 했는데
어떤 빛은 잎을 통과했고
어떤 빛은 신께로 돌아갔다.
돌풍에 흔들린 잎사귀 사이로
국수 다발 같은 빛줄기가
욕지거리로 질척한 토사물 위에 쏟아졌을 때에는,
빛이란 그런 식으로 낭비돼선 안 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흰자위가 붉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린 눈을 감지 않았다.
빛이 동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에도
행인 몇이 건전한 눈빛을 쏘아
빛의 교란을 시도하였으나
해는 이미 서산 꼭대기 팔각정을 넘어섰고
마지막 빛이 망막에 닿는 순간
눈꺼풀이 닫혔고
아, 제목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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