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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

< 대설주의보 >

by 제페토* 2018. 5. 14.

< 대설주의보 >

 

 

눈이 무릎까지 쌓인 밤

인적 없는 곳에 이르러

더 이상 눈치 볼 것 없음을 알게 되면

그깟 세상 시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키가 자라나 달빛을 닦는 수고가 좋았고

고드름으로 목을 축여도 좋았다.

가슴 또한 넓어져 발굽 달린 산짐승을 위해

배춧잎 넉넉히 버려진 절름발이네 밭까지

길을 내준 일도 좋았다.

굴삭기에 옆구리를 다친 야산을 끌어안고

1도쯤 체온을 올려준 다음

볼품없는 털을 언제까지고 쓰다듬은 일은

겨우내 자랑이 되었다.

 

'저어기, 주인 모를 똥 위에 하얀 봉분이 생겨나

그런대로 이름 없는 죽음들에 대한 예우도 갖추어졌고 하니

흰둥아, 오늘은 고라니를 쫓지 말아라.'

 

이제 세상을 한없이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는

천변의 왜가리 죽음에 노하여 삵의 죄를 추궁하다가

왜가리에게 당한 개구리와

개구리에게 당한 메뚜기를 떠올리고는

곧장 현실로 떨어져 내렸다.

 

절룩이며 돌아가는 나의 등 뒤로

왜가리 깃털이 바람에 날리며 말했다.

'인마, 거룩해지지는 마.'

 

집에 닿기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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