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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 가는 대로, 함부로

< 낮술 >

by 제페토* 2013. 10. 1.

< 낮술 >

 

 

너그러워지는 시간입니다

늦었지만

당신은 좋은 분이었을 거라 믿겠습니다

본래 나쁜 사람이었다고는

생각지 않겠습니다

 

자, 한 잔 주시고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당신을 용서하고자 합니다

 

아직은 이른 시간

창밖의 행인들 얼굴이 얼마나 온화한지,

발치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두 시의 햇빛은

또 얼마나 몽환적인지,

비 그친 가을 하늘과

식당 앞 아스팔트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수면에서

잘게 부서지는 빛에 관하여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후의 심판관이 되어 

밥풀 흘린 일까지도 용서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생각이 술을 이기지 못하고 주제로부터 이탈한 사이

느릿하게 몸 흔드는 길 건너 가로수의 관능을 보았습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자, 한 잔 받으시고

 

부러 당신을 몰라 뵌 시간.

부디 나타나

저를 용서하셔야겠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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